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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작가의 토롱라 넘기 2장

by 물안개(권영미) 2008. 2. 24.
      
      [네팔 트레킹-안나푸르나 라운드] 문명권에서 오래 전 잃어버린 본성의 길
    

         해발 5,000m대 토롱라 고개를 넘으며 생각하게 된 인생길

욕망의 대폭발을 세계사적으로 가장 극렬하게 경험하고 있는 조국의 모든 것들은 다 전생의 일이었던 것 같다. 마천루처럼 드높은 릴리단다 마을에서 마신 블랙티 맛과 아름다운 카나니온 마을의 푸른 보리밭, 수백 미터가 넘는 시양제폭포, 암벽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뚫린 벼랑끝 길을 방울소리 부드럽게 내면서 줄지어 흐르던 당나귀 대열과 마부들의 발소리, 그리고 그 협곡과 협곡으로 띠를 이루며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의 모든 풍경이 뜨겁게 본성이 솟구쳐 올라오는 자유로운 내 영혼 속으로 달려 들어온다.

‘나의 샹그리라, 마낭’ 아름다운 강변마을 탈(Tal·1,700m) 어귀의 현판엔 그렇게 쓰여 있다. 탈 마을부터 구룽족들이 많이 사는 람중 지역이 끝나고 티벳문화가 물씬 풍기는 마낭 지역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티벳 불교의 상징인 룽다(지붕 위나 대문 앞에 거는 깃발)가 부쩍 많이 보인다.

한낮에도 바람 끝이 차다. 해발고도가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이다. 원래 네 번째 밤을 차메에서 지내기로 했지만, 자주 비나 눈이 오는 바람에 티망에서 짐을 푼다. 눈길이라 그만큼 체력소모가 크다. 요기를 하고 누에고치처럼 침낭 속에 몸을 오그리고 뉘었더니, 멀고먼 우주 바깥까지 밀려나온 기분이다. 꿈에, 내가 걸어온 신의 길들이 사방으로 흘러다닌다.
                                               
  내일도 계속 눈이 내린다면 이쪽 지역의 중심마을 마낭까지 가는 것조차 불가능할는지 모른다. 옆방에서 누군가 돌아눕는 소리, 낮은 한숨소리가 들린다. 히말라야에선 누구든 가엾은 존재의 본성를 만날 수 있다. 아마도 그 누군가가, 허겁지겁 욕망을 쫓아오느라 생겨난 생(生)의 물집들을 지금 옆방에서 터트리고 있는 모양이다. 별은 오늘밤에도 보이지 않는다.

해발 3,540m의 마낭은 큰 마을이다. 근처에 비행장도 있다. 그러나 경비행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활주로엔 눈이 1m 이상 쌓여 있다. 앞서간 많은 여행객들이 눈 때문에 토롱라를 넘지 못하고 되돌아 내려오느라 야단이다. 나 또한 쿠디에서 마낭까지 일 주일이면 올 수 있는 길을 열흘 걸려 오지 않았던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내린 피상(Pisang·3,200m)에선 이틀이나 오도가도 못하고 한 로지에 부초해 있다가 겨우 떠났으며, 피상-마낭 사이의 삼나무숲 사잇길인 불과 십 리도 안 되는 거리를 한나절 넘게 걸어왔을 정도이다.

다행히 날씨가 하루 종일 맑다. 마낭을 떠나 야크카르카(Yak Kharka·4,018m)까지 걷는 길은 그야말로 히말라야라는 이름의 뜻 그대로 ‘눈의 보금자리’이다. 서울에서 가져간 선글라스로는 눈에 반사되는 강렬한 빛을 모두 차단시킬 수 없어 좀더 자외선 차단 강도가 높은 선글라스를 동행자에 빌려 바꿔간다. 해발 4,000m가 가까워 바람 끝이 찬데도 한낮엔 눈의 복사열이 온몸을 찌르고 들어와 사우나탕 속에 있는 느낌이다.

군상(Gunsang·3,900m)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먹는다. 눈 때문에 토롱라를 끝내 넘어가지 못한 트레커들이 계속 엇갈려 지나간다. 군상은 아침부터 햇빛 속에서 자태를 뽐내던 안나푸르나 3봉(7,155m)과 활대같이 휘어진 능선으로 연결된 강가푸르나(Gangapurna·7454m)가 가장 잘 보이는 마을이다. 포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강가푸르나 북쪽 사면에 쌓였던 눈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폭풍처럼 밀려내려오고 있다.

설연이 안개처럼 휘몰아친다. 7,000m가 넘는 산의 전신이 거의 말쑥하게 드러나 보이는 지점이다. 푸르스름한 빙하의 발톱까지 낱낱이 보인다. 어찌 안나푸르나와 강가푸르나뿐이겠는가. 돌아보면 멀리 8,000m가 넘는 마나슬루의 눈그림자도 보이는 것 같고, 또 고개를 돌리면 하늘 끝까지 채우고 뻗어나간 수많은 설산의 스카이라인이 손금을 보는 것처럼 가깝고 또렷하다. 며칠째 계속 눈이 내려 쌓여 흰 광채는 낮은 곳 높은 곳을 가리지 않고 천지간에 가득한데, 부드러운 눈의 그림자 사이로 오로지 휘돌아가는 마르샹디 강의 푸른 빛만 본래의 제 고유한 색깔을 뽐낼 뿐이다.

‘불 켜지듯이 환히 눈도 부셔라 흰 눈이여 / 신의 지문이 찍혔을까’로 시작해 ‘부디 한 바다의 밀물을 담아 / 무거운 수심(水深)으로 다져져라 빌기에 / 목숨으로 제물을 삼았거니’로 절정을 이루는 김남조 선생의 시 ‘설화’가 절로 입속에서 맴돈다. 히말라야의 설산들은 그것 자체로 목숨이고 죽음이다. 그곳엔 삶과 죽음, 문명과 반문명의 경계도 없으며, 시간의 눈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티끌 하나 없이 고도의 청정한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색계(色界)에 도달한 느낌이다. 히말라야를 십 년 넘게 자주 다녔으면서도 이렇게 압도적이고 강렬한 설경은 처음이다.

    심연과 같이 깊은‘사원’에 와 있는 느낌

  다시 강가푸르나를 등지고 걷는다. 열흘 이상 걸어온 데다가 사방의 흰 광채 때문일까, 무엇에 잔뜩 취한 것처럼 걷는 발걸음이 도무지 두서가 없다. 비탈길을 한참 내려와 출렁다리를 건넌다. 이상한 것은 사람이 내려갈 수 없는 벼랑 아래 위태로운 사면에도 가끔 살아 있는 그 무엇이 지나간 발자국들이 있다는 것이다. 인가도 없고 마을로 통하는 길이 아니라서 당나귀나 야크가 걸어갔다고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날렵한 짐승의 발자국도 아니다.

“짐승의 발자국도 아니잖아?”
“설인인가 보지. 예티(Yeti) 발자국.”
동행자의 대답이 예쁘다. 히말라야산맥의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설원에 사는 걸로 알려진 예티의 존재는 산사람들에겐 절대적이면서 형이상학적인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 경계가 없고, 그 어떤 번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히말라야의 이상향인 샹그릴라와 함께 히말라야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신성(神性)이자 영원한 꿈이다. 히말라야 사람들은 그 신성과 꿈을 잃지 않아 문명권의 우리네보다 더 순정적이고 그늘이 없는 따뜻한 눈빛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야크카르카 윗마을에서 쓰러져 눕는다. 해발 4,000m가 넘었고 트레킹을 시작한 지 열하루째가 되는 밤이다. 창 너머 내다보니 수천 수만의 별들이 우주 밖의 현인들처럼 반짝이고 있다. 어떤 별은 조금 붉고 어떤 별은 조금 푸르고 어떤 별은 하얗다. 지구에서의 거리에 따라 별의 빛깔이 다르다는 걸 책에서 잃었지만, 정말 별 하나 하나가 제 몫의 색깔을 뽐내는 건 처음 본다. 또 어떤 별들은 윤동주의 시구처럼 ‘바람에 스치우며’ 떨고 있다.

다시 새벽이다. ‘설날’이어서 서울에서부터 가져온 북어포와 과일을 로지 뜰 눈의 제단 위에 간단히 차려놓고 차례를 올린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승에 계시지 않으니 아버지 어머니는 멀고 먼 이곳 해발 4,000m 넘는 설산까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실 터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일주를 위해 ‘포터’의 역할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면 그들은 네팔의 주식인 달밧(Daal Bhat)을 먹으면서 하루를 정리한다.

“상차림은 초라해도 히말라야를 보세요, 어머니.”
 눈밭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다.
토롱라 고개를 넘어갈 수 있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히말라야의 산신령과 아버지 어머니의 혼백이 협상하기에 달렸다는 어린애 같은 생각이 든다. 아버지 어머니는 살아생전부터 자식사랑에서 이미 선적(禪的)인 경지에 이르렀으니까 능히 히말라야 신들과도 맞장을 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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