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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작가의 토롱라 넘기 1장

by 물안개(권영미) 2008. 2. 24.
    [네팔 트레킹-안나푸르나 라운드] 문명권에서 오래 전 잃어버린 본성의 길
    
      해발 5,000m대 토롱라 고개를 넘으며 생각하게 된 인생길
 
  안나푸르나는 곡식과 풍요라는 뜻을 가진 안나와 푸르나의 합성어이다. 농업을 관장하는 힌두교 여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인도 대륙과 티베트 고원을 동서로 가르고 흐르는 네팔 히말라야의 중심선에 안나푸르나의 제1봉(8,091m)을 비롯, 제2봉(7,937m) 제3봉(7,855m) 제4봉(7,525m) 남봉(7,219m)과, 동서 외곽으로 마나슬루(8,156m) 다울라기리(8,167m)가 서로 연접하고 중첩되어 거대한 하나의 산군을 이루고 있다. 일찍부터 트레킹 코스가 발달하고, 또한 세계인으로부터 특별한 인기를 누리는 것도 우연이 아닐 터이다.

안나푸르나 산군을 한 바퀴 크게 도는 안나푸르나 일주 트레킹코스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은 토롱라(Thorungla·5,416m))다. 야카와캉(Yakawakang·6,482m)과 카퉁캉(Kathungkhang·6,484m) 사이로 넘어가는 이 고갯길은 서쪽 사면이 워낙 경사가 급해 보통사람들은 하루만에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고개를 넘어가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여행객들은 일반적으로 시계 반대방향을 따라 마낭, 군상, 토롱패티를 지나 묵티나스로 내려간다.

그동안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여러 차례 다녀왔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토롱라를 넘어보지 못한 것 또한 그 때문이다. 시간에 쫓기거나 체력에 자신이 없어서 갈 때마다 매번 좀솜 혹은 묵티나스에서 발걸음을 멈춰야했던 것이다. 안나푸르나 일주코스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돌려면 보통 두 주일 이상이 걸린다.

▲ 묵타나스에서 좀솜으로 향하는 하산 길은 정상을 정복하면서 써버린 소진된 체력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게의 압력 속에 고통을 발등에 실은 듯 아프고 고달팠다. 

       "불멸의 초월적인 세계처럼 보이는 히말출리"

  일주코스 트레킹은 베시사하르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차를 대절한다면 람중(Lamjung)의 중심지인 베시사하르(besisahar)를 지나 쿠디(Khudi)까지 곧장 들어갈 수 있다. 비포장 길이지만 경사가 거의 없고 평탄해서 차에 흔들리면서 마르샹디 강을 따라가는 경험도 나쁘진 않다. 카트만두에서 출발해 베시사하르를 지나 쿠디까진 6시간 이상 걸린다.

첫날밤을 쿠디에서 잔다. 해발 800m로 카트만두보다 오히려 낮은 곳인데, 안나푸르나 빙하가 녹은 물길, 마르샹디 강이 휘돌아가기 때문일까, 저물 녘 차에서 내려서자 섬뜩한 한기가 몰려든다. 구룽족들이 주로 모여 사는 쿠디 마을은 마르샹디 위에 걸린 출렁다리를 중심으로 강 양쪽에 나뉘어 분포되어 있다.

간간이 빗발이 뿌리는 안개구름 너머로 안나푸르나가 제 속살을 은밀히 감추고 있는 게 창 너머로 넘어다 보인다. 여간해서 비가 오지 않는 2월인데 계속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게 수상하다. 해발고도가 높아진 안나푸르나의 내경(內景)엔 눈이 내려 쌓이고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일기예보에 이번 주 계속 날씨 안 좋데요.”

현지 안내자의 말도 마음에 걸린다.
이튿날,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날씨는 여전히 좋지 않다. 쿠디 마을 뒤로 올라서자 강을 따라 휘돌아가는 평평한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동차도 다닐 만큼 넓고 편안해 뵈는 흙길이다. 오랜만에 텅 빈 흙길을 밟고 가니 단번에 문명의 두건을 벗은 듯 마음이 쾌적해진다. 30분 정도 걸어가자 불레불레 마을이 나온다. ‘불레불레’는 우리말로 하면 ‘보글보글’ 정도의 뜻이다. 근처에 온천이 있어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안내자의 설명을 듣는다.

▲ (왼쪽) 당나귀는 최고 60kg까지 물건을 짊어지고 홀로 걷기도 힘든 산길을 앞서 걸으며 묵묵히 임무를 수행한다. (오른쪽) 히말라야에서 닭은 트레커들이 가장 많이 선호하여 찾는 보양식 음식이다. 그들이 더 높은 곳에 이를수록 닭의 값도 비례해서 올라간다.

 차 한 잔을 마시는데 해가 비친다. 체로 받혀낸 것처럼 맑은 햇빛이다. 아직 하늘 한 켠은 구름장으로 덮여 있지만 햇빛이 비쳐주니 새 세상을 얻은 기분이다. 출렁다리 하나가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마르샹디 강 위에 걸렸는데, 너무 예쁘다. 한 떼의 당나귀들이 나보다 앞서 출렁다리를 건너간다. 

“저기 좀 보세요!”
동행자 한 사람이 전방을 가리킨다. 하아, 하고 유리창을 닦기 위해 입김을 불 때 같은 소리가 저절로 내 입에서 나온다. 잊을 수 없었던 예전의 연인을 다시 만난 듯이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 바로 히말출리(Himal Chuli·7,893m)와 가디출리(Ngadi Chuli·7,835m)의 중첩된 정수리가 구름 위로 날렵하게 솟아올라 떠 있다. 그것은 마치 불멸의 초월적인 세계처럼 보인다.

길은 가디를 지날 때까지 평탄하다. 가디(Ngadi·920m)에서 점심을 먹고 떠났더니 곧 마르샹디 강과 가디 강이 합쳐지는 지점이 나오고, 한참 후 또 한 번 출렁다리를 건넜더니 비로소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이제부터 바훈단다(Bahundanda·1,300m)까진 비교적 가파른 오르막길. 시루떡을 쌓아놓은 것처럼 축적된 계단식 논밭이 좌우에서 도열한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특히 람파다 마을에서 바훈단다까진 아주 경사가 급하다.

‘브라만들이 사는 언덕’이라는 뜻의 바훈단다는 이 근처에선 가장 큰 마을답게 호텔과 상점도 많고 또 학교도 있다. 네팔의 학교는 일반적으로 초등학교와 중등과정이 함께 붙어 있다. 마을 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찬드루다야 학교도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과정이 5년, 중학교 2년, 고등학교 과정이 3년이다. 때마침 유서 깊은 학교의 개교 50주년을 맞아 마을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다. 50주년 개교 기념행사를 겸해 고등학교 과정을 5년제로 늘려 외국의 학제와 맞추려는 캠페인을 함께 벌인다는 것이다.

외부 손님이 많아 간신히 방을 구하고 학교에 들렀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좁은 운동장을 빼곡이 채우고 앉아 있다. 군수를 비롯하여 네팔의 국민시인이라고 불리는 마덥 프라샷 기미레씨가 연단의 중앙에 앉아있는데, 반백의 노시인 풍모가 히말라야를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기미레씨는 네팔의 초중고 교과서는 물론 대학교재에도 그의 작품이 실려 있어 계층과 남녀노소를 뛰어넘어 모든 네팔인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다. 내가 연단으로 올라가 한국작가라고 하고 인사를 건넸더니 노시인은 반색을 하고 내 손을 잡으면서 놀빛에 물들기 시작한 맞은편의 설산을 가리킨다.

“보세요. 네팔, 저렇게 아름답습니다.”
노시인은 다짜고짜 그렇게 말한다.
현재 찬드루다야 학교는 약 300명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어떤 학생들은 두 시간이 훨씬 넘는 험한 비탈길을 걸어 등교한다. 칠판 하나뿐인 어두컴컴한 흙벽과 양철지붕 아래의 교실에서 공부하지만 그들은 꿈과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개발시대의 우리가 그랬듯이 교육이 수직이동의 지름길이라는 걸 믿기 때문이다. 기미레 시인도 이 학교 출신은 아니지만 이곳이 고향이기 때문에 카트만두로부터 먼 길을 걸어 기꺼이 개교 기념행사에 참가했다고 한다. 노시인이 자꾸 연단 아래까지 따라 내려오며 당신의 조국이 얼마나 아름답고 자랑스러운지 설명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정말 눈물겹고 감동적이다.


‘히말라야 설산은 그것 자체로 목숨이고 죽음’

  날씨는 계속 흐렸다 맑았다 오락가락하더니 사흘쯤 지나면서부터는 아예 햇빛을 보여주지 않는다. 해발고도는 서서히 높아진다. 둘째 날은 참제(Chamje·1,430m), 셋째날 밤은 다라파니(Dharapani·1,860m), 넷째날은 티망(Timang·2,270m)에서 짐을 푼다. 비로부터 눈발로 바뀌었기 때문에 다라파니를 지나면서부터는 무리해 걸을 수가 없다. 이대로 눈이 계속 온다면 토롱라를 넘지 못하고 되돌아올는지도 모른다.

“토롱라에 눈이 굉장히 많이 쌓여 있대요.”
전문 산악가이드도 자신이 없는 눈치이다. 넘어가지 못한다면 걸어 올라간 그 길을 되돌아 내려와야겠지만, 고개를 꼭 넘어가야 무엇이 ‘완성’되는 건 아니다. 히말라야에선 ‘목표’라는 개념은 쉽게 무화(無化)된다. 문명권에선 자동차가 길을 열지만 히말라야에선 신께서 모든 길을 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는 비록 고산등반은 아닐지라도 신생아처럼 순정적인 마음으로 걷지 않으면 안 된다. 산을 넘어가는 물길이 없고 물길을 건너가는 산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우주적 관점으로 볼 때 채 티끌조차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일진대, 저 거대한 만년빙하가 둘러친 히말라야에선 신에게 귀의하려는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고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샹디 강은 정말 역동적이다. 길은 계속해서 강을 따라 흐른다. 어떤 땐 강과 눈높이가 가까워지고, 또 걷다보면 어떤 때 마르샹디는 까마득한 수백 미터 절벽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며 흐른다. 석회질이 조금 섞였지만 절벽 아래의 강물은 진녹색이다. 수백 미터 폭포가 강물 위로 직접 낙하하는 장관도 하루에 몇 번씩 볼 수 있다.

몸은 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지지만 문명의 폭력성이 끌어올리는 욕망의 수렁에서 빠져나왔으니 마음은 새털처럼 가볍다. 나는 때로는 빗속을, 때로는 눈발 속을 꿈인 듯 생시인 듯 걷는다. 설봉을 인 채 거의 직벽으로 솟아올라간 젊은 히말라야의 정수리들과 벼랑 사이로 쭉쭉 뻗어 올라간 삼나무 숲과 격정적으로 휘돌아가는 마르샹디 강의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내경들이 속속들이 내 감수성의 모니터에 생생히 들어와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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