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토피아 -
박범신작가의 토롱라 넘기 3장 본문
오늘은 토롱패티 하이캠프에서 잘 예정이다. 하이캠프는 해발 4,450m의 토롱패디에서 두 시간 정도 아주 가파른 사면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체력이 관건이다. 4,800여m의 하이캠프에서 고소증을 느낄 것인가 하는 것도 위험한 변수 중 하나이다. 길이라고 해야 앞서간 몇몇 사람들의 발자국뿐이다. 토롱패티에 이르는 마지막 구간은 45도 이상의 경사면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길로서 눈이 없을 때도 종종 산사태가 난다고 한다. “산사태 눈사태도 막아주시고요….” 겨우 북어포를 올린 차례상 앞에서 요구하는 것도 많다. 아버지 어머니의 혼백은 묵묵부답이다. 그래도 나는 서울에서보다 당신들과 훨씬 가깝게 다가서 있다고 느낀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왜 나는 자꾸 험한 히말라야로 달려오는 것일까. 히말라야의 설산들이 주는 불멸의 이미지와 초월적인 그림자, 혹은 영원성 때문일는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그 설산들 사이에 와 있으면 거대한 심연과 같이 깊은 ‘사원’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는 사실이다. 교회나 성당에 갔을 땐 주께서 그곳을 떠난 것 같고, 절에 갔을 때 역시 부처께서 배금주의에 매몰된 그곳을 떠난 것 같이 느낀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러나 히말라야에서 나는 한번도 신을 부정한 적이 없다. 때때로 가파른 설산 사이의 협곡을 걷다보면, 신의 길이 보이는 듯할 때도 있다. 문명권에서 이미 오래 전 잃어버린 본성의 길이다. 나는 경배드리는 마음으로 다시 떠난다. 토롱라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뉘어나간 설산들의 스카이라인 때문에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푸르쿵(Purkung·6,120m)에서 출루 동봉(East Chulu·6,558m)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6,000m급 봉우리들의 도열이다. 그들과 맞서 왼쪽 방향으로는 묵티나스히말이 나를 따라오고 있다. 한 번 가고 말면 영영 돌아나올 수 없는 심연의 길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히말라야의 협곡은 좁고 깊다. 어느 방향에선지 눈사태 굉음이 또 울린다. 금방이라도 쏟아져내릴 것 같은 사면 위의 적설을 올려다보다 말고 나는 한 차례 부르르 전신을 떨고 만다. 마침내 해발 5,416m의 토롱라를 향해 출발한다. 5,000m 가까운 토롱패디 하이캠프에서 일행 모두가 심한 고소증을 만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새벽 3시, 별이 총총하다. 대충 요기를 하고 로지를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칼날 바람이 목덜미를 물어뜯고 달려든다. 방한복을 껴입고 겹으로 장갑을 꼈는데도 금방 손끝이 시리다. 체감온도로는 족히 영하 20℃를 넘을 것 같다.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끝내 고개를 넘지 못하고 되돌아간 데다가 바람에 날린 눈들이 그나마 혹 있었을지 모르는 발자국을 덮어버렸기 때문에 길은 우리 스스로 내면서 걸어야 한다. 8,000m 이상 등반경력도 많은 백전노장의 전문 셰르파와 동행해 온 것이 정말 다행이다. 전문 셰르파가 앞에서 길을 찾아 뚫고 나가면 그 뒤를 포터들이 밟고 가고, 비로소 우리 일행이 랜턴 불빛에 의지하여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잡는다. 조금만 잘못 디뎌도 천길 벼랑으로 휩쓸려 갈 것인데, 지형이 눈 안에 들어오질 않으니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앞서 간 사람이 지도를 만드는구나.’ 나는 입 속으로 중얼거린다. 어찌 눈길을 가는 일뿐이겠는가. 앞서 간 사람을 쫓아서 가는 건 모방의 삶일 뿐이지만,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면서 새로운 길을 내고 가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다. 고통스러운 탐험을 통해 미지의 세계로 길을 여는 사람들이 그렇고, 자신의 안락을 뿌리치고 놀라운 탐구심으로 새로운 문명의 지평을 여는 사람들도 그렇다. 이를테면 콜럼버스가 길을 내어 우리는 태평양을 갖게 되었고, 라이트 형제가 있어 우리는 동력에 의한 비행기를 타고 히말라야에 오지 않았던가. 표고가 높아질수록 바람이 거세진다. 어떤 순간의 바람은 허리를 세우고 전진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늘엔 별이 총총하지만 바람이 쌓인 눈들을 거칠게 날리기 때문에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눈바람과 맞서야 한다. 오전 9시쯤부터 인도 대륙과의 기압 차이에서 오는 바람이 불거라고 들었는데 정보가 잘못된 듯하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눈보라가 심할 때에도 숨거나 기댈 곳이 없으니까 겨우 허리를 잔뜩 굽히고 눈보라가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손가락이 너무 시려 지팡이 잡은 손끝에 감각이 거의 없다. ‘나는 나를 주인으로 한다.’ 법구경에 나오는 말이다. 나밖에 따로 주인이 없으므로 마땅히 나만이 나를 다루어야 하는데 나를 다룰 때에는 ‘말을 다루는 장수처럼’ 하라는 경구가 떠오른다. 몇 발자국 건너 사람들이 동행해 걷고 있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거나 엄살을 부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내 몸을 오로지 내가 ‘말을 다루는 장수처럼’ 다루어서 어둠과 무릎이 파묻히는 적설과 혹한을 뚫고 나갈 수밖에 없다. 함께 걷고 있으나 철저히 혼자 걷는 실존의 시간인 셈이다. 차츰 몸의 감각은 없어지고 오로지 관성을 쫓아 내 숨결에만 의지해 앞으로 나간다. 이른바 저절로 도달한 무념무상의 텅 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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